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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골목길 喜怒哀樂 싸리재골목과 내동골목
동네 안을 이리저리 통하는 좁은 길, 바로 골목이다. 골목엔 사람들의 인생사, 도시의 역사가 묻게 마련이다.
오랫동안 인천을 지켜오던 골목의 희로애락 이야기를 따라가보자
개화기 인천의 최대 번화가 싸리재 골목에서 인천의 옛 명성을 만나다 ‘축현’은 싸리재의 한자 이름이다. 싸리재는 배다리철교를 지나 경동사거리에 이르는 고개를 가리킨다.
고갯마루에 싸리나무가 많아 생긴 지명이라고 한다.
1961년 인천에서 신호등이 처음 켜진 곳도 경동사거리였다. 길 입구 언덕에 기독병원이 일었고 그 주변에 개인병원들이 들어서면서 더불어 약방과 약국이 많았던 곳으로 늘 사람들로 붐볐던 곳이라고 한다.

가구점 사이에 경기의료기라는 의료기판매점이 있는데 지금은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들어 경동의료기 옆에 카페 ‘싸리재’라는 간판을 붙여 카페를 겸하고 있었다. 천장 서까래에 ‘소화 5년 4월 5일 오후 3시’글씨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1930년에 지은 건물로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과거와 현재에 공존하는 듯한 묘한 인상을 주는 곳이다.

싸리재 골목은 아직도 옛 추억을 고스란이 곱씹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바로 애관극장이다.
인천 사람들의 시네마 천국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그렇다고 영화만 상영한 것이 아니었다 미스터유니버스 선발대회, 취업 알선 설명회, 국정 홍보 등을 개최했으며, 세계적인 음악가 번스타인의 피아노 연주회가 열렸던 곳이기도 하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스크린을 가진 애관극장은 당대 스타였던 신성일과 엄앵란이 무대 인사를 하러 오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일대 교통이 마비되기도 했다.
싸리재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돌체소극장’이다.
돌체는 최영준, 김성찬, 정주희 등 100여명의 연극인을 배출한 인천 연극의 산실이었다. 1978년 얼음공장을 개조해 객석과 무대공간을 만들어 문을 연 그 곳에 현재는 문화공간 플레이캠퍼스가 그 명맥을 새롭게 이어가고 있다
극장 뒤 언덕을 오르면 신신예식장이 있다. 60년의 역사를 가진 곳으로 80년대엔 인천에서 좀 산다하는 사람들은 거의 신신예식장에서 예식을 치렀다고한다.
지금은 간판만 덩그러니 남아있지만 신신예식장은 이 거리에 웨딩문화의 씨앗을 뿌렸다.
길 양편으로 드레스숍이나 한복집, 사진관 등 결혼과 관련한 상점들이 자리 잡으면서
웨딩거리로 명명되었고 아직도 드레스숍이 남아있는 곳이다.
그 당시, 한 마리사, 김테일러, 회신양복점, 서울라사, 잉글랜드양복점, 자유라사, 신라라사, 백양테일러 등 30여 개의 양복점이 성업을 이뤘다.
길 모퉁이 이수일양복점은 한창때는 재단사, 봉제사 등 20명을 두고 장사를 했었다고도 한다. 대를 이어 부자(父子)가 양복을 맞춰 입을 만큼 오랜 세월을 싸리재 골목과 함께한 양복점이다. 70~80년대 유행일번지 인천의 옛 명성을 만나고 싶다면 싸리재 골목으로 가보자
독립운동가 김구에게 의미심장한 역사적 장소였던 내동골목
‘나는 38 이남만이라도 돌아보리라하고 제일 먼저 인천에 갔다. 인천은 내 일생에 뜻 깊은 곳이다.
스무 두 살에 인천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스무 세 살에 탈옥 도주하였고 마은 한 살에 17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에 이수되었다......중략
‘인천 감옥에서 수행 생활을 하는 동안, 인천 개상장을 통해 유입된 신문물을 익히며 항일운동가로서의 사상을 정립했다’- 백범 일지 중에서


중구 내동 월아천과 경인면옥 주변 골목으로 20세 청년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님이 일본 군사 간첩을 죽인 ‘치하포 사건’으로 체포되어 수감되었던 인천감리서가 있던 곳이다.
현재는 동인천 스카이팰리스 오피스텔 앞 그 터에 표지석만 남아 있다.
백범 김구선생의 옥바라지를 위해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감리서 삼문 밖에 있는 물상객주 박영문의 집에서 식모로 일했었는데 감옥에 있는 아들에게 하루 세끼 밥을 갖다 주었다. 현재도 월아천 주변 내동 골목에는 작은 방들이 여럿 있고 마당이 있는 구조의 옛 물상객주집 형태의 집들이 여럿 남아 있다.
내동 성공회 성당
내동교회 언덕길을 내려오면 붉은 서양식 주택이 있는 ‘내동 벽돌집’으로 불리는 유항력 저택이다. 유항렬은 한국 최초의 도선사다. 1937년 우리나라 최초로 도선사 자격증을 따 조선우선주식회의 선박 선장으로 인천-칭따오-상하이간을 운항한 사나이다.

이 저택은 지상2층, 지하1층 구조로 1933년에 지어졌으며 벽돌 아치와 굴뚝 등이 이국적이다. 테라스가 서쪽으로 향해 있는데 팔미도 등대쪽을 바라보며 망원경으로 팔미도 앞으로 들어오는 배들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지금은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이민사의 첫 장을 연 내리교회도 골목으로 이어져 있다.